나의 수필(수원서울)

유린당한 인권

시육지 2017. 12. 12. 03:47

                   

                                                  유린당한 인권

 

                                                                                              최병우

 

공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구속을 당하고 고통을 받는다면 이는 경중을 떠나 민주사회에서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러한 일을 젊은 시절인 1974년 수원에서 경험하였다,

 

경북 영주에서 수원으로 이사 온지 얼마 안 되어 이웃과 아직 가까이 지내지도 못했던 어느 일요일 봄날 아침이었다. 쉬는 날이라 고등동 셋집 단칸방에서 마음 놓고 두 살배기 아들과 함께 아침잠을 자고 있었는데 날벼락이 떨어졌다.

 

밖에서 나를 찾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냐고 물으니 수원경찰서 형사라 했다. 물어볼게 있으니 잠간 나와 달라하기에 간단한 겉옷을 걸치고 문 밖으로 나왔다. 형사는 수배중인 사기범을 찾는 중이라며 내 이름이 최병우냐고 물었다. 나는 맞는다고 답했고 이어서 신분증도 보여줬고, 직업도 공무원이며, 본적도 사실대로 답해주었다.

 

내 말을 들은 형사는 사기범은 40대인데 이 사람은 10년이나 젊어 보이네? 아니잖아!” 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의 표정으로 미루어보아 내가 수배중인 진범이 아님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형사는 잠깐이면 되니 일단 경찰서에 가서 조사하자고 했다. 나는 같은 공직자의 입장에서 수사에 협조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그의 차를 타고 경찰서로 향했다.

 

경찰서는 처음이었다. 형사과에 들어가니 일요일이라 그런지 당직자 한 사람만 전화를 받고 있었을 뿐 조용했다. 나를 데리고 온 형사는 당직자에게 나를 인계하면서 당진경찰서에서 의뢰한 사건이니 그곳의 형사가 직접 와서 확인해야합니다. 그러니까 그 때까지 기다리세요. 잠깐이면 됩니다.”라 말하고는 외근한다며 나가버렸다.

 

조금 있으니 아내가 궁금하여 택시를 타고 어린애와 함께 왔다. 나는 아내와 함께 형사과 사무실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무료하게 약 30분을 보냈다. 서해대교가 없었던 그 때에 당진을 떠나 수원까지 오려면 몇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는데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었다. 칭얼대는 어린아이와 피곤한 씨름을 하고 있는 아내를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당진에서 형사가 오면 만나본 후 갈 테니 염려 말고 집에 가 있으라.”고 안심시키며 아내를 집으로 가게 했다. 그리고 당직 형사와 단 둘이서만 사무실에 있게 되었다.

 

사무실을 자세히 살펴보니 한쪽 구석에 쇠창살로 가로막힌 유치장이 있었다. 남녀 모두 약 5-6명이 그 곳에 갇혀 있었다. “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갇혀 있는 것일까?”궁금증이 들었다. 그러나 그곳에 내가 들어가게 될 줄은 전혀 생각 못했다.

 

한참이 지났다. 처음 이곳에 올 때는 수사에 협조하려는 의도였으나 아무 잘 못도 없는 나를 이곳에 계속 붙잡아 두는 그들의 처사가 못 마땅하여 당직자에게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합니까? 이거 너무 한 것 아닙니까?”라고 불만을 표시했다. 그 말이 나오기 무섭게 이리 오세요, 여기 들어가 기다리세요.”라 말하며 유치장 철문을 열고 강제로 나를 밀어 넣고 잠가버렸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내가 혐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드럽던 그 형사가 왜 갑자기 돌변 했을까? 어이가 없었지만 현실이 되고 말았다. 철창 밖 사무실을 보니 점심시간 인 듯 텅 비었다. 결국 점심식사하기 위해 나를 유치장에 가둔 모양이었다. 나는 차가운 콘크리트 벽에 등을 기대며 마루에 주저앉았다. 나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다른 사람들은 아마도 자기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이 들수록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뭐 이런 형사들이 있나! 이런 사람들이 경찰의 수준이란 말인가! 자기들만 편리하면 된단 말인가!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 곳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만했다. 한쪽 구석의 가림 대 없는 수거식화장실에서 풍기는 심한 악취와 불결함은 완전한 인권의 사각지대였다. 철창 문 하나만 막힌 것뿐인데 너무 차이가 났다. 환경 뿐 아니라 행동의 자유도, 표현의 자유도 박탈당한 죄인의 신세가 돼버렸다.

 

나는 갇혀있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저들도 나와 같은 입장이려나? 아니야, 나보다는 덜 억울하겠지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면 될 것을 왜 짜증을 내어서 이런 고생을 하나!" 며 아쉬움도 가져봤다.

그러다간 형사가 너무 심했다. 혐의가 없음을 분명히 알고도 가두다니! 고약한 놈!”하며 마음속으로 무수한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그런 욕을 퍼붓고 원망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오후가 되니 사람들은 음식을 배달시키거나 가족들이 가져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지만 내겐 그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 유치장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아내에게 알려주는 것이 문제였다. 집에 가서 순진하게 나를 기다릴 아내를 생각하면 조바심이 났다. 지금과 같이 이동전화가 있었으면 좋으련만 내겐 집 전화조차도 없었다. 고심 끝에 출석하였던 교회로 전화하기로 했다.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전화해 줄 사람이 없지 않은가. 하는 수 없이 음식 배달 온 아주머니에게 전화번호를 간신히 적어주며 선처를 부탁했다.

 

지루하고 무료한 두 세 시간이 지나갔다. 유행가도, 찬송가도 불러보고 주기도문과 사도신경도 암송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분통이 터져 배길 수가 없었다. 오후 네 시쯤 되었을까. 철창너머 사무실에서 갑자기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얼마 후 문이 열려 나가게 되었다. 목사님 내외가 아내를 데리고 와 계셨다. 너무 반가웠다. 집에 가게 될 기쁨에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그곳에 있는 동안 목사님과 아내가 당진에서 온 형사들을 만났는데 그들의 요구가 황당하지만 들어줘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요구는 간단했다. 외견상 내가 진범이 아닌 듯은 하지만 당진경찰서에 같이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편리를 봐 줄 테니 차량의 기름 값이나 달라는 것이었다.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조금 전 유치장안에서 품었던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목사님과 아내의 권유로 마음을 삭히며 그들이 요구한 금액 오천 원을 아내의 지갑에서 꺼내 주었다. 그들은 그 돈을 받자마자 당연한 것처럼 떠나 버렸다.

 

허탈했다. 잘 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일이었다. 집에 돌아와 생각하니 신체적, 정신적으로 구속당했던 억울함이 뼈에 사무쳐오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왜 오천 원을 줘야만 했던가. 한 달 월급이 약 삼만 원인데 이게 될 말인가? 울화통만 터졌다.

 

저녁이 다 될 무렵 내가 왜 수배를 받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 아내와 함께 고향집을 찾아가 알아보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미 철거되었지만 오래전 같은 지번에 살다가 이사한 사람의 이름이 나와 같았던 것이었다. 수수께끼는 풀렸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형사들의 치사한 처사에 놀아난 내 자신이 부끄럽기 짝이 없다.

 

민중의 지팡이인 경찰! 당시 그들에게 경찰 본연의 봉사정신까지는 기대할 수 없었어도 무죄한 시민을 강압적으로 구금한 파렴치한 횡포는 인권유린이며 나를 분노케 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시대가 변했다지만 앞으로 이러한 일들은 우리 주변에서 절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