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초등)

자취(自炊)

시육지 2019. 12. 25. 06:49

                      

자취(自炊)

                                          

1958년 나는 수원시 외곽에 있는 수원북중학교에 입학했다. 수원은 초등학교 시절 어쩌다 버스로 서울을 갈 때 지나치긴 했으나 처음이었다. 당시 수원은 중심가를 제외하곤 변두리는 수도와 전기만 있었지 초가집이 절반이나 되었고 도로는 비포장으로 내가 살던 시골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중학생이 된 내게 아버지는 묵은 합판을 잘라 낮고 작은 책상을 만들어 주셨다. 아무런 칠도 하지 않아 전체가 꺼칠꺼칠했다. 시외버스 차장에게 눈총을 받으며 간신히 싣고 수원엘 왔다.

 

자취방은 학교에서 가까운 거리의 기와집이었다. 방은 약간 큰 편이었고 부엌에는 한쪽에 땔감과 아궁이, 부뚜막에는 양은 솥이 걸려있다. 자취생은 세 명으로 모두 고향 한동네 학생이었다. 이학년이 둘이고, 일학년은 신 참인 나였다. 이학년 형들은 지난 일 년 동안 자취를 해 본 선배였다.

 

며칠을 지내면서 나는 식사문제가 제일 큰 어려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다행히 어린 사내아이들이 걱정되었든지 작은댁 아주머니가 오셔서 밥을 해 주셨기 때문에 잘 지낼 수 있었다. 아주머니가 시골에 가셔서 안 계셨을 때는 형들이 지난 경험을 무기 삼아 밥을 곧잘 지었다.

 

그때마다 형들은 내게 가르쳐 주었다. 쌀 씻는 법, 밥물 높이 맞추는 법, 불을 때다가 김 나면 잠시 쉬었다 조금 더 때어 뜸 들이는 요령도 알려 주었다. 김치를 비롯한 간장, 된장, 고추장 등 반찬은 시골집에서 모두 가져왔기 때문에 찬장에서 조금씩 덜어 먹으면 되었다. 식사 후 설거지 요령도 배워 몇 번 해 보았다.

 

땔감용 나무는 시골에서 가져올 수 없어 북수동 화홍문 아래 수원 천변 나무 시장에서 사 왔다. 나무장사들은 광교산에서 나무를 하여 지게에 짊어지고 이곳 시장으로 와서 지게를 뻗쳐 놓은 채 손님을 기다리다 만나면 흥정한 후 배달해 주었다. 화홍문을 통해 흘러나오는 수원천의 맑은 물로 많은 여인이 빨래하는 모습이 신기한 듯 외국인들이 자주 찾아와 사진을 찍어댔다.

 

자취 기간은 길지 않았다. 비록 일 년의 짧은 자취 생활을 마치고 곧 하숙 생활로 이어졌지만, 응석 배기 티를 벗고 자립해본 내 인생의 귀한 체험이었기에 너무 소중한 나의 추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