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같은 누님
어머니 같은 누님
나는 중학교에 다니면서 과외공부를 하거나 학원엘 다니지 않았어도 성적은 반에서 상위권이었다. 졸업이 가까울 무렵 고등학교 진학에 대한 식견이 없어 시골에서 농사지으시는 형님에게 조언을 구했다. 형님은 앞으로는 농업에서 공업화가 되는 추세이므로 공업 분야를 선택해야 취업이 잘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나는 형님의 의견에 따라 자신의 개성이나 적성을 고려하지 않고 경제적인 문제를 생각하여 국비로 학비를 지급해주고 취업도 잘 되는 서울에 있는 국립 서울교통고등학교(현 철도고등학교)에 응시하여 합격한 후 큰 누님댁에서 3년간 기거하며 다녔다.
학교가 용산구 한강로에 있으므로 마포구 아현동 집에서 시내버스를 주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차비를 아끼려고 서울역까지 걸어가 검표원에게 “수고하십니다”라는 말과 함께 거수경례하면 무임으로 승차할 수 있는 열차를 이용한 게 거의 절반은 되었다. 그리고 아침 일찍 출근하시는 매부와 같이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설 때면 시간이 넉넉하여 공덕동과 효창공원과 원효로를 거쳐 학교까지 약 한 시간을 무거운 가방을 들고 걸어 다녔다.
큰 누님은 나보다 22살이나 더 많을 뿐만 아니라 내가 태어나기 전에 결혼하셨다. 그래서 나는 열 살 때쯤 말로만 듣던 서울엘 가서 누님을 만나 보고서야 그 존재를 알게 되었다. 누님은 진정 내겐 어머니 같은 분으로서 자상하시고 인자하시기가 그지없었다.
누님네는 산비탈에 있는 작은 집으로 좁은 방이 셋이었다. 그중 하나는 세를 주고 두 개만 사용하였다. 이곳에 누님과 매부와 시동생, 그리고 4남매와 나까지 함께 살았으니 누님은 고사하고라도 매부는 얼마나 불편하셨을까. 아침과 저녁 그리고 점심 도시락까지 꼭 챙겨주셨을 뿐만 아니라 고지대라서 수돗물 사정도 좋지 않았는데 3년 동안을 겉옷과 속옷까지도 손빨래해주신 누님이시다.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열어보면 매부께 차려드리는 밥상에도 없던 귀한 달걀 프라이가 항상 들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은혜에 감사를 백번이라도 했으련만 그때는 당연한 양 감사하다는 말 한번 않고 무덤덤하게 지냈으니 부끄럽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매부께서 위암으로 돌아가신 후에 자식들 뒷바라지하시느라 누님은 건축공사장에 나가 심한 일을 하셨다. 그렇게 인자하고 자상한 누님께서 오래 사셨으면 좋았으련만 그렇질 못했다. 내 몸보다 남 돌보기를 좋아하시는 그 고귀한 성품 탓에 본인의 건강을 신경 쓰지 못하여 어느 날 갑자기 오십 후반에 뇌출혈로 쓰러져 돌아가셨으니 슬픔을 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