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실버의 아침편지
최 병 우
정서가 메마른 요즘 우리 실버들의 속 깊은 마음을 편지글로 담아 사랑하는 배우자나 자녀들에게 보내심이 어떨까 하여 글을 써봅니다.
저는 원래 글짓기 재주가 없습니다. 편지 몇 줄 쓰다가 막혀 그만둘 때가 다반사입니다. 알고 있는 어휘도 많지 않아 표현도 제대로 못 합니다. 그래서 남이 쓴 글을 보게 되면 그분들의 머리와 마음 그리고 손가락은 어떻게 생겼나 궁금하기도 하고 존경심이 생깁니다.
몇 년 전 어느 날 새벽, 거실의 시계와 주방의 냉장고 소리만이 고요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저도 이들과 함께 적막과의 동행에 들어갔습니다. 노트북을 켜고 웹서핑을 하던 중 마음에 와 닿는 좋은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목이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 천년이 흘러도”라는 시인데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나 혼자서 읽고 말기엔 너무 아까워서 집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보니, 갑자기 지금까지 나와 함께 고생하며 살아온 아내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아내는 꽃다운 24살 나이에 제게 시집을 와주었습니다.
청량리역에서 기차로 11시간 거리인 낯선 강원도 묵호에서 신혼살림이 시작되었습니다. 보증금도 없이 월세 1,000원인 단칸방이었습니다. 사과상자를 옆으로 놓아 찬장으로 썼습니다. 고생이 고생인 줄 모르고 당연한 것처럼 살았습니다.
영주읍에서 셋방살이를 할 때, 연탄가스 중독으로 2살짜리 첫 아들과 우리 세 식구 모두가 죽을 번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수원에 와서는 쥐꼬리만 한 봉급으로 두 아들 키우기도 벅찬데, 중고생이었던 큰집 조카 3명을 수년 동안 묵묵히 뒷바라지하기도 했습니다.
향남으로 이사 와서는 생전 해보지 않던 농사일이며 식당 일까지 하며 고생한 아내가 안쓰럽고 너무나 고맙고 위대해 보였습니다.
연약한 여자이지만 이렇게 강하고 귀한 아내에게 제 가슴속에 담긴 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까를 고심하면서, 조금 전 컴퓨터에서 본 글을 베껴서 제 마음을 편지로 전하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비록 제가 직접 지은 시는 아니지만 제 마음이 담긴 이 편지를 받았을 때, 아내의 마음은 어떨까?
아내가 놀라고 기뻐할 모습을 상상하니, 온몸이 하늘을 나는 듯 기뻤습니다. 제 생각은 옳았습니다. 필체가 좋지 않아 컴퓨터로 편지를 출력했습니다. 편지를 봉투에 넣어서 풀로 붙인 다음, 보내는 사람, 받는 사람을 썼습니다. 주소를 쓰고 보니 같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체국에 가서 부치려고 생각해보니 며칠이 걸릴 텐데, 제가 없는 사이에 받아 읽으면 아내의 모습을 확인할 수가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날 저녁 아내에게 “내가 당신에게 쓴 편지야”라고 하면서 편지를 건네고는 얼른 제 방으로 와버렸습니다.
그 편지에 썼던 시를 여기에 옮겨 적어봅니다.
-아내에게-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 천년이 흘러도
사랑을 다해 사랑하며 살다가
내가 눈 감을 때까지 가슴에 담아 가고 싶은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지금의 당신입니다.
세월에 당신 이름이 낡아지고 빛이 바랜다 하여도
사랑하는 내 맘은 언제나 늘 푸르게 피어나
은은한 향내 풍기며 꽃처럼 피어날 것입니다.
당신 이마에 주름지고 머리는 백발이 된다 하여도
굽이굽이 세월이 흘러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몸 하나로 내게 온다 하여도
나는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사랑하는 것이 아닌
그 사람 마음과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름지고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사랑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만약 천년이 지나 세상에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당신이 꼭 내 눈앞에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가슴에 묻어둔 이름 석 자 “우*희”
그리고 당신만의 향기로 언제나 옆에서 변함없이
당신 하나만 바라보며 다시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내가 죽고 다시 천년의 세월이 흘러
내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사랑하는 사람은
단 하나 부르고 싶은 이름
지금 내 가슴 속에 있는 이름 당신 “우*희”일 것입니다.”
몇 분이 지났을까.
아내가 내 방문을 열고 “여보 나 감동 먹었어”라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습니다. 저는 얼떨결에 “어! 그래”라고 하면서 아내를 힘껏 안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아내에게 “여보, 나 그 글 인터넷에서 베낀 거야”라고 했더니, “알아요. 그거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너무 고마워요”라며 환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아내는 그 편지를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처제와 며느리에게도 보여주며 자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은 푼수야”라고 했더니, “진짜 푼수는 당신이지 뭘”이라고 하기에 우린 함께 크게 웃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