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의 기억
최 병 우
1950년 6.25전쟁
해방둥이인 내겐 그 때가 생생하다.
경기도 화성군 정남면 발산리 시골동네
전투지역은 아니었지만 전쟁의 불행은
그 곳까지 찾아왔다.
칠월 초 오산 죽미령전투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 같은 포성으로 창문이 마구 흔들릴 때
겁먹어 무서워하는 나에게
두꺼운 솜 모자로 귀마개 삼아
이불 둘러 덮어 안방에 숨겨주셨던 어머니 모습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어느 날
아버지만 남으시고
온 가족이 소 몰고 새미재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오후
포 소리 크게 들려 모두 호두나무 밑에 숨었는데
나무 바로위로 집채보다도 더 큰 군용기가 불붙은 채
낮게 날아가더니
“꽝” 소리와 함께 포탄과 소총탄 터지는 소리가
밤새 들렸다.
(미군용 수송기가 향남면 방울산에 추락한 것임)
짧은 피난생활
그곳도 불안하여 우리 집으로 되돌아온 얼마 후
조용했던 시골마을은 슬픔의 바다가 되었다.
우리 큰 형님 또래 청년들이
영문도 모른 채 강제로 의용군에 끌려가
용주사에서 잠간 훈련받고
인민군 복을 입고 한 없이 남쪽으로 내려가
낙동강 전투의 총알받이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여태껏 소식 없으신 형님의 모습 생각하면
분단의 비극이 한없이 밉다.
1951년 1.4후퇴 후
오산까지 밀렸던 유엔군의 반격을 하늘에서 보았다.
수십여 대의 미 공군 무스탕 전투기가 마치 에어쇼 하듯
적군을 향해 기총소사 하던 모습을
그냥 구경삼아
동네 마루태기에서 보았다.
집 앞 디딜방앗간에서 나는 친구들과
M-1 실탄, 카빈총 실탄, 딱콩총 실탄을 가지고
터트리며 재미있게 놀기도 했다.
면소재지 복판에는 폭탄 맞아 생긴 두 개의 큰 웅덩이에
물이 잔뜩 고여 있었고
그 옆 아버지 따라가서 1952년에 입학한 초등학교는
교실이 없어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뉘어
운동장 나무 그늘 밑을 교실로 사용했다.
초토화된 이 나라 이 강산
백년이 가도 일어서지 못하리라 했다지만
우리는 근면과 배움으로
슬픔과 가난을 이겨내고
굳건히 오늘의 이 나라를
일으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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