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젤린의 고향 아카디아의 슬픈 역사 / 최병우
나는 카나다 노바스코시아 주를 수년 전에 4개월간 여행한 적이 있다. 이 주는 카나다 동남부 끝 대서양 연안의 반도로서 면적(5.5만㎢)은 남한(10만㎢)의 절반이 넘지만, 인구는 고작 90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 주 인구분포는 영국계가 80%이고 프랑스계가 18%이다. 공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친환경지역이고 주요 산업은 어업과 제지업이다.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후 유럽은 경쟁하듯 북미대륙을 탐험하고 식민지화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약 1세기 후 1604년에 프랑스인들이 현재의 노바스코시아 주에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이들은 원주민들과 서로 도우며 척박한 땅을 땀 흘려 개간했다. 그리하여 카나다에서 가장 비옥한 땅을 만들어 농사를 짓고, 어업에 종사하며 평화로운 뉴 프랑스 마을을 건설하였다. 이들이 아카디안(Acadian)이고, 이 지역을 아카디아(Acadia)라고 한다.
농사일 하며 평화롭게 사는 아카디안(교회내 그림)
그로부터 약 150년이 지난 1755년에 영불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이 이 곳에 영국군을 보내 자국의 영토로 선포하고 뉴스코틀랜드(New Scotland)란 뜻의 프랑스어인 노바스코시아(Nova Scotia)로 지명을 바꿨다. 그리고 14세 이상의 남자에게 프랑스를 대적하여 싸우든지 아니면 떠날 것을 명령하였다. “아카디안”들은 중립을 고수하였으나 결국 추방을 당하게 되었고, 마을은 영국군에 의해 불타서 사라졌다. 그로부터 10여년 후 뿔뿔이 흩어져 살던“아카디안”들의 일부가 고향을 다시 찾아와 마을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는 주도 할리팩스에서 서쪽으로 약 250km 떨어진 해안가 시골마을(쇼냐빌)에 있는 처제네 집(120년 된 나무집)에서 기거했다. 그 곳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느낀 것은 그들의 순박함과 친절함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그랑프레 유적지 여행을 권하였고 며칠 후엔 에반젤린 동상이 있는 그 곳을 여행할 수 있었다.
에반젤린이 결혼식을 올렸던 교회와 에반젤린 동상
그 곳은 핼리팩스에서 북쪽으로 약 70Km 떨어진 펀드만 연안의 거대한 초원이란 뜻의 그랑프레(Grand Pre) 지역이다. 너무나 넓고 아름다운 것이 마치 우리나라 평야지대나 천수만을 연상케 했다. 선대 아카디안 들이 이루어 놓은 넓고 아름다운 마을은 영국군에 의해 사라졌지만, 그들의 후손들은 그 벌판 한 가운데 유적지를 세워 자신들의 슬픈 역사를 기념하고 있다. 박물관 앞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영어와 불어로 나란히 쓰여 있었다. (불어는 생략함)
“Statue of Evangeline, Longfellow's heroine”
This statue of Evangeline, heroine of Longfellow's epic poem, Evangeline : A tale of Acadia, is a powerful, emotive symbol of the Deportation. It connects the story of Evangeline to the history of Grand Pre
박물관 앞 안내판 및 전경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 관람한 후 밖으로 나와 에반젤린 동상이 있는 곳으로 갔다. 막히는 것 없이 탁 트인 초원을 보며 이 땅이 얼마나 전원적이고 평화로웠는지를 상상하게 되었다. 한 가운데 에반젤린의 동상이 서 있고, 그 뒤에 결혼식을 올렸다는 교회가 있다. 에반젤린이 실존인물인지 아닌지, 이 교회가 당시의 교회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전쟁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뿔뿔이 흩어져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교회 안으로 들어가 보니 사방 벽면에 영국군에 의해 추방당하는 아카디안 들의 그림과, 방화로 불타는 집들의 그림이 걸려있다. 순간 일제가 제암리 교회에 불을 지르고 교인을 학살한 사건이 생각나 연민을 느꼈다.
며칠 전 쇼냐빌에서 프랑스 계 주민들이 그랑프레를 꼭 여행해보라고 권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이곳이 그들의 조상 얼이 담긴 슬픈 유적지이며 마음의 고향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역사가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작가 롱펠로우가 이를 배경으로 쓴 <에반젤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에반젤린이라는 처녀와 가브리엘이라는 청년의 사랑 이야기다. 이 서사시는 결혼식을 올리는 도중 흩어져 강제 이주를 당하고, 이후 에반젤린이 남편 가브리엘을 찾아 평생을 방랑하는 슬픈 이야기다.
영국군의 진압 영국군의 방화
아카디안들은 카나다 국기와는 별개로 아카디아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깃발을 함께 게양한다. 프랑스 국기에 아카디아의 별을 그린 깃발로 아카디안들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은 우리민족 만큼이나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꿋꿋하게 공동체를 이루고 옛것을 되찾아 풍요로운 아카디아를 만들어 평화롭게 살고 있다. 서로 인정하고 아껴주고 배려하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다.
<에반젤린>의 일부를 소개해본다.
강물처럼 덧없이 생애를 흘러 보내고 있던
아카디아 농부들의 고향이었던
그 초가 마을은
지금 어디로 사라졌을까?
아름답던 농장들은 황폐해지고,
농부들은 영영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시월의 세찬 바람이 먼지와 나무 잎들을
휘몰아 하늘 높이 끌고 올라가 멀리 바다 위에 뿌리듯이,
그들은 산산이 흩어져 버렸고,
다만 아름다운 그랑프레 마을의
전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추방당하는 아카디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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