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초등)

내가 받은 상의 의미

시육지 2019. 12. 16. 20:56


 

내가 받은 상의 의미 / 최병우


나의 책장에는 손바닥 크기의 아주 낡은 책 한 권이 진열되어 있다. 61년 전 초등학교 졸업식 때 상으로 받은 국한 사전이다. 이 책은 나와 각별한 인연이 있어서 그 사연을 두서없이 적어본다.

1958년 정문초등학교 제2회 졸업생은 56명이었다. 그중에 남자가 32, 여자가 24명이었다. 나는 담임선생님을 좋아했다. 그런 인연으로 선생님께서는 내 결혼식의 주례도 맡아 주셨다. 돌아볼 때 이런 정도의 관계였으니 남다른 사제의 정이 흘렀던 것임이 틀림없다.

 

시험이 다가오면 선생님은 시험문제를 등사원지에 철필로 써서 등사판에 붙이고 롤러에 잉크를 묻혀 굴려 가며 인쇄를 해내셨다. 그때 선생님은 나를 교무실로 불러 그 일을 시키시곤 하셨다. 그 일을 시켜놓으시고 텅 빈 교무실에 나만 놔두시고 교실로 가셔서 수업하셨다. 지금 같으면 시험지 사전 유출이라고 난리가 날 일이다.

 

선생님은 나의 순수함을 믿으셨는지 아니면 시험을 잘 보게 해 주시려 했는지 그 의도는 지금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때 나는 시험문제를 한 번도 훔쳐 읽어 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 문제들을 눈으로 읽어 보는 순간 다른 아이들에게 죄짓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학교공부는 재미있었다. 그렇다고 실력이 다른 아이들과 비하여 앞선 것은 아니었다. 여름방학 때 놀러 온 서울 학생들과 비교해 보면 금방 표가 났다. 그들의 방학 숙제 문제집을 보면 해답을 보고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실력 차이가 났던 것은 시골 학생들이 처한 열악한 환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의 경우를 살펴봐도 알 수 있다. 학교공부를 끝내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책 보따리를 마루 끝, 기둥 뒤에 내동댕이치고 나가 놀았던 것이다. 어떤 때는 부모님에게 붙잡혀 밤늦게까지 집안일을 하기도 했다. 어제 내려놓았던 책 보따리를 풀어보지도 않고 그대로 다시 들고 등교하였던 일도 허다하였다. 그것은 나만이 아니고 다른 아이들도 같은 환경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나는 공부시간이 재미있었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나를 비롯한 모든 학생이 과외나 별도의 지도를 받지 않아서 실력은 고만고만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내가 2등을 차지했으니 신기했다. 매번 1등을 했던 녀석은 머리가 뛰어났었는지 아니면 남몰래 공부를 아주 많이 했는지 모르지만, 항상 나보다 점수가 많이 앞섰다.

 

졸업식을 며칠 앞두고 사은회가 벌어졌다. 어머니에게 음식을 만들어 학교로 가져와 달라 했더니, 집에서 기르던 닭을 잡아 백숙을 해오셨다. 다른 학부형들은 선생님을 만나 자랑삼아 음식도 전하며 인사도 하는데 어머니는 부끄러워서, 다른 학부모에게 선생님께 전해달라고 맡기고는 줄행랑을 치셨다.

 

그러한 가운데 사은회는 시작되었다. 그런데 남학생들은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었지만, 여학생들은 뭐가 그리 슬픈지 우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여자들은 딸이라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던 당시의 환경 때문인 것 같다. 그런 가운데 사은회도 끝났다.

 

며칠 후 졸업식 날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졸업생 대표로 내가 최고의 상인 경기도지사상을 받았던 것이었다. 부상으로 자그마한 국한 사전도 받았다. 당연히 1등에게 돌아갔어야 할 그 상을 2등인 내가 받은 것이었다. 영문도 몰랐던 나는 본의 아니게 1등 친구에게 괜히 미안했고, 겸연쩍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랬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선생님은 공부시간에 다른 학생들 문제로 노하시다가도 내가 어쩌다 선생님에게 재롱떨듯 말을 하면 나는 병우가 말할 때는 웃음이 나온다라고 하시며 노여움을 푸셨다. 또 나이 많은 토박이 반장을 제외하고는 전학 온 지 일 년 밖에 안 된 나에게 부반장과 자치회 회장을 맡겨주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선생님은 나를 아주 귀엽게 봐 주셨던 겉 같다. 그런 내용도 모르고 5학년 후배들은 내가 우리 반에서 제일 공부 잘하는 학생이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졸업식장에서 상을 받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허공에 뜬 기분이었다. 졸업장, 우등상장, 개근상장, 도지사 상장과 상품으로 받은 국한 사전을 남이 쳐다볼까 봐 부끄러워 옷 속에 감추고 뛰어서 집에 도착했다. 숨을 가라앉히고 어머니께 자랑했다. 상품으로 국한 사전을 받았다고 신나게 설명해 드렸는데도 어머니는 , 그래라 대답만 하시고 칭찬도 없으셨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61년이나 지났음에도 1등이었던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은 여전하다. 그렇지만 그 책은 나에게 엄청난 교육의 길잡이가 되었다. 단기 4288년도에 삼문사에서 발행한 670쪽의 조그만 책, 비록 누렇게 훼손은 되었으나 그때의 유일한 유품으로 지금도 나의 책장에 떳떳하게 진열되어 양아들처럼 백세시대를 같이 보내고 있다.

 

나는 이 책과 더불어 삶에서 얻은 지식을 가능한 많은 사람과 공유하려고 애쓴다. 이것이야말로 선생님이 내게 상을 주신 깊은 뜻이라고 여기며, 앞으로도 그 뜻을 기리려는 생각으로 나눔과 베풂의 삶을 이어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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