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일 도우려 먼 길 시댁엘 다녀왔던 아내 / 최 병 우
영주에 살 때 봄철 농번기가 되면 시부모님을 모시는 화성 형님으로부터 농사일을 도와달라는 연락이 오곤 했다. 직장에 다니는 내게 아니라 아내에게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리였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를 데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그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영주에서 청량리역 까지 열차로 다섯 시간, 청량리 역에서 서울 역까지 시내버스로, 서울 역에서 수원 역까지 열차로, 수원 역에서 수원시외버스 정류장까지 시내버스로, 또 정남면 소재지 까지 시외버스로, 그리고 도보로 삼십분 거리, 중간에 기다리고 옮겨 타는 시간까지 합하면 무려 20여 시간 정도나 되는 거리였으니 어린아이를 들쳐 업고 이동한다는 그 자체가 무리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달랐다. 많은 며느리들이 시댁과 지근거리에 살면서도 요리조리 핑계를 대고 발길을 멈췄지만 아내는 아무 불평 없이 노 시부모님을 생각하고 농사일을 도우러 그 먼 거리를 다녀오곤 했다. 내가 같이 갔다가 아내를 남겨두거나 어느 때는 혼자 가서 보름정도 씩 일을 하다가 오곤 했다. 나는 그러한 아내가 마치 천사와도 같이 느껴졌다.
시골에서 시부모님과 함께 농사일 하시는 형수님은 남자 못지않은 체력의 소유자였다. 남편인 형님과 시부모님을 도와 그 많은 농사일과 가사를 감당하였다. 시골의 농번기는 너무 바빠 눈코 뜰 새 없다. 거기에다 학교 다니는 다섯 자녀 뒷바라지까지 하노라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형수님이었다. 그래서 도움을 청한 것이라고 이해했었기에 나는 아내의 힘든 수고를 용인할 수 있었다.
아내는 먼 고생길 마다하고 시댁의 큰 동서 밑에서 묵묵히 농사일을 도와주었다. 어린아이를 보살피며, 때마다 식구들 밥해대고, 누에 칠 땐 뽕잎 따다가 놓아주곤 했다. 결혼하기 전까지 머슴 두셋씩 둔 집에서 곱게 자란 아내로선 너무 힘겨운 일이었다. 칭얼대는 어린아이를 혼자 돌보며 익숙하지 못한 재래식 부엌, 우물에서 물 길어와 씻고 닦는 일, 식자재를 찾으려 광이나 장독대로 헤매었던 일 등 연약한 아내의 몸으로서는 버거웠다. 더구나 청결함이 몸에 밴 아내는 농촌의 거칠고 빠른 살림살이에 적응하지 못하다 보니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칼국수 만들었던 일은 지금도 생생하다 한다. 형수님이 들로 나가며 점심을 칼국수로 준비하라고 했다. 알았다고 했지만, 그것은 비통함의 시작이었다. 칼국수를 만들어본 경험은 없었지만 대충 요령을 들어보니 할 수 있을 것 같아 시작했다. 그러나 밀가루 반죽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양푼에 밀가루 두 양지기를 퍼 담아 물을 붓고 반죽을 시작했으나 조절이 안 되어 물과 밀가루를 반복하여 수차례 추가하였다. 그러다 보니 양은 많아졌고 반죽의 완성은 점점 더 멀어진 채 등줄기에서 땀만 비 오듯 흐르고 있는데 시간은 흘러 점심때가 된 것이었다.
식구들의 인기척 소리가 안마당에서 들려왔다. 식구들이 들 일하다가 시장하여 점심 식사하려고 집에 오신 것이었다. 아내는 안절부절못했다. 하느라고 열심히 했지만,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으니 유구무언은 당연하였다.
죄지은 것 같아 급한 마음 추스르고 있는데 갑자기 열두 살 위의 형수님이 부엌에 들어와 보더니 “이때껏 뭣 하고 있었냐.”고 호통을 쳤다. 마음이
오그라들어서 하던 일도 잊고 서성거렸다.
그때 인자하신 시어머님께서 감싸주셨던 일은 잊을 수가 없다. 시장기를 느끼며 온 식구가 기다리고 있으니 아내 마음은 외줄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날 식구들은 도마 위에 칼로 국수 자르는 소리부터 끓는 소리까지 모두 들어가며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군침 삼켰던 점심을 하였으니 그 칼국수는 별미와 별식이 되고 말았다.
시어머님은 너무 자상하시고 다정다감하시고 인정 많으신 분이라며 아내는 지금도 말하곤 한다. 보름 동안을 지내고 영주로 향할 때면 어머님은 꼬깃꼬깃 꾸겨진 지폐 몇 장을 살며시 손에 쥐어주시며 “잘 가라. 잘 살아라”라고 하셨다 한다.
아침 일찍 아이를 등에 업고 시댁을 나설 때 갈 길이 멀어 고생될 것 같은데도 발걸음은 가벼웠다. 보름 전 힘들여 왔던 그 하룻길을 되돌아가면 저녁때쯤에는 남편이 영주 역에 마중 나와 “여보! 수고했어, 얼마나 힘들었어.”하고 반가이 맞아 줄 것을 생각하는 새색시의 입가엔 행복한 미소가 꽃보다 아름답게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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