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보 때문에 마련한 내 집 / 최병우
내 집이란 말은 스쳐만 들어도 황홀하다. 내 집이 없어 서러움을 당해본 사람이면 누구든지 느껴보는 그리움이다. 아이들이 마음껏 재롱부리고 뛰놀 수 있는 안식처, 비록 작더라도 행복과 사랑이 깃든 내 집을 마련하기를 얼마나 원했던가. 그 소원을 이루었던 지난날의 젊은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묵호와 영주에서 살아온 셋방살이 신혼 4년은 고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지냈다. 그러나 1974년 수원에서 둘째 아들이 태어난 후 전셋집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살 때부터 어려움은 시작됐다. 두 놈 중 큰아들은 조용한 편이었으나 둘째 놈은 엄청 속 썩이며 울어댔다. 달래고 겁을 줘도 소용없고, 장롱 속에 가둬도, 입을 틀어막아도 소용없다. 그럴수록 더욱 핏대를 올리며 큰 소리로 울어댔다. 호랑이도 곶감도 무서워 도망갈 울보 깡패였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자기 남편을 핑계 대며 나가 달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이웃으로 방을 얻어 이사했다. 재래식 부엌이었으나 방이 넓어 옹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부터 아내의 고생은 배가되었다. 시골에 계신 형님이 주인집 방을 세 얻을 테니 고등학생인 조카를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아내는 거절하지 못하고 아침저녁 밥과 점심 도시락을 싸주고, 속내의까지 손세탁을 해주게 되었다. 나는 내심 조카까지 살펴주는 아내가 존경스러웠다.
그때 큰집에서 반찬값이라도 보내주었으면 좋았으련만 박봉의 공무원으로서 너무 힘들었다. 공무원은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보다 편하고 잘 산다고 생각했었을까? 그때 반찬값이라도 보태주었으면 어린것들이“고기 좀 먹어봤으면”하는 투정은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조카 돌봐주는 것은 두 어린 아들을 키우는 것에 비하면 그나마 쉬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울보 깡패 둘째 아들 때문이었다. 밥을 할 때도 화장실 갈 때도 등에 업어주지 않으면 기차 화통처럼 울어댔다. 이 소리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히 대학에 다니는 안집 아들의 불만이 대단했는데 그는 고등학생들을 모아 놓고 집에서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가정교사였다.
엄마 등에서 내려놓기만 하면 울어대는 지긋지긋함, 공부에 방해된다고 아이에게 다가와 “뚝”하고 눈 흘기는 안집 아주머니에게 받는 눈총, 이로 말미암아 아내는 마음에 심한 스트레스를 입었다. 집 없는 서러움에 상처 입고 지쳐 눈물만 수없이 흘렸다. (나중에 초등학교 졸업하고 심장 수술함)
나는 아내의 이런 고충을 직장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거의 모르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육아의 고통과 안집 식구들에게 당한 모멸감을 서글픈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떨어져 살아요. 큰 아이는 당신이 큰집에 데리고 가서 살고, 작은 애는 내가 친정에 데리고 가서 살 테니까요, 안집 아주머니가 나가라니 어떻게 해요.” 눈시울을 적시며 말하는 아내의 모습에서 나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러나 이사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느 날, 그 날도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았는데 아이가 또 심히 울어서 학생들 공부를 방해했다. 안집 아주머니가 얼른 아이를 등에 들쳐업고 밖으로 나가며 아내에게 이사해 줄 것을 다시 종용했다. 이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사를 해야만 했다. 나는 출근하면 잊지만, 아내는 이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온종일 견디느라 몸과 마음이 항상 천근만근이었다.
어느 날, 나는 퇴근하면서 어떤 집으로 또 이사하나? 그 집에선 우리 식구를 받아 줄까? 아무래도 부동산엘 가봐야겠다는 이런저런 걱정을 하며 집에 들어섰다. 그런데 아내가 작심한 듯 나에게 전혀 불가능한 말을 꺼냈다.
“우리 집을 사요”
“뭐! 집을 사?”
“오늘 마땅한 집을 알아봤어요. 13평짜리 단독주택인데 280만 원이래요.”
“돈도 없는데 어떻게 집을 사? 안 돼”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나를 몇 번이고 설득시키며 다음 날 그 집을 가보자고 말했다.
약간 높은 지대에 자리 잡은 적 벽돌집인데 대지 32평에 건평 13평인 단층이었다. 남향이지만 햇빛이 앞집에 많이 가려있다. 방 2개와 거실 겸 방 1개, 부엌, 다락이 전부다. 안방은 우리 네 식구가 쓰고, 거실 방은 고등학생 조카가, 건넛방은 세를 놓으면 된다고 아내가 설명했다.
나는 수긍은 갔으나 돈이 문제였다. 어떻게 280만 원을 마련할 수 있냐 물었다. 그러나 아내의 구상은 나를 뛰어넘었다. 너무나도 간결했고 의지도 단호했다. 지금 사는 전세방 빼면 40만 원, 건넛방 하나 전세 놓아 20만 원, 은행융자 120만 원 승계받고, 결혼 패물 팔면 20만 원, 모자란 돈 80만 원은 부모님께 부탁드려 보자는 것이었다. (그 후 적금 들어서 장기간 상환하느라 공무원 박봉에 엄청 힘들었다)
나는 아내의 집요한 주장에 승복하고 건축주와 계약을 하였다. 우리 식구들이 살 집이라 생각하니 온통 마음이 들떴다. 직장에 있어도 마음은 집에 와 있었다. 잔금을 치르고 입주할 날이 아직 남았지만, 매도자의 허락을 받아 집 안팎을 살폈다. 신축 후 오랫동안 빈집으로 놔두어 손 볼 곳이 많아 퇴근하면 밤늦게까지 손을 보았다. 연탄가스로 죽을 뻔했기 때문에 아궁이도 확인하고 굴뚝엔 가스배출기도 달았다.
잔금을 치르고 이사하여 입주하던 날, 그 날을 나와 아내는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다. 13평마저도 방 하나를 전세 놓아 공간은 좁지만, 안방에서 아이들과 함께 우리 부부, 거실 칸막이 방엔 고등학생 조카가 사용했다. 협소하여 생활하기 불편하고 고단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울보 깡패 둘째 아들이 큰 소리로 울어대며 소란 떨어도 조용히 하라고 겁 안주고, 입 틀어막고 야단치지 않아도 되었다. 그때 그 녀석 때문에 젊은 나이에 남보다 먼저 집을 사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지금은 오히려 마흔여섯 살 된 아들이 오히려 고맙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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