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행정리후)

가족 3대 탁구시합 / 최병우

시육지 2019. 9. 18. 21:50


가족 3대 탁구시합 /최병우


추석 전날, 외지에 살던 아들, 며느리, 손자녀들도 다 모였다. 음식 준비가 거의 끝나갈 저녁 무렵 아내가 느닷없이 가족 대항 탁구시합을 하자고 제안했다.

 

여보! 이렇게 모두 모인 김에 탁구시합 해요. 당신하고 나하고 한팀, 아들하고 손자하고 한팀을 이뤄 복식 게임을 합시다

 

이 제안에 나는 잠시 망설였다. 몇 달 전 아내와 탁구로 인해 벌어진 악몽 같은 냉전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때 쌀쌀했던 아내는 벌써 자상한 손길과 다정한 말투로 되돌아 왔고, 내게도 그 기억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되어 곧바로 그 제안에 응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간 쌓아 올린 탁구 실력을 자식들한테 자랑하고 싶어 하는 아내의 속마음을 내가 직감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아내가 아직 건강하기에 그러한 제안을 했다고 생각하니 내 마음도 상쾌했다.

 

간편한 복장을 하고 그 날 밤에 열 식구가 모두 탁구장에 갔다. 아내와 내가 한팀이고, 40대 아들과 고등학교 2학년 손자가 한팀이 되었다. 70대 노인과 젊은이가 대항하는 시합이며, 또한 3대에 걸친 선수가 출전하는 경기였다. 나머지 여섯 식구는 편을 갈라 응원했다.

 

여기서 잠깐 각자의 탁구 실력을 살펴보자. 나는 펜홀더형인데 30, 40대에 직장에서 점심시간마다 여럿이 어울리는 탁구를 했기 때문에 기본기는 없지만, 경력만큼은 제일 오래됐다.

 

아내는 노부부는 취미가 같아야 좋다라는 나의 권고로 시작해 탁구장에 다니며, 신체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셰이크핸드형으로 기본기부터 열심히 연마한 실력파다. 다만 체력과 경력에서는 제일 뒤진다.

 

둘째 아들은 어디서 배웠는지 보통이 아니다. 동료들과 가끔 시합하면 모두 이긴다고 한다. 펜홀더형인데 기본기는 엉망이지만 백핸드 스매싱은 일품이다. 나도 그런데 유전인가 싶다. 그렇지만 요즘은 직장에서 동호인야구와 골프에 빠져 있어서 어떨지 모르겠다고 했다.

 

고등학교 2학년 손자는 다르다. 셰이크핸드형인데 포핸드 드라이브와 백핸드 드라이브도 구사할 줄 아는 실력파다. 어려서부터 탁구를 배우도록 내가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이다. 단지 허점은 게임에 능하지 못하고, 요즘은 농구에 빠져 탁구를 오랫동안 하지 않은 약점이 있다.

 

시합이 시작되기 전 잠시 아내와 손자가 가볍게 랠리를 하며 몸을 풀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모두가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왜냐하면, 아내의 실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내의 경쾌한 리듬과 탁구 라켓에 공 부딪히는 소리가 시청각으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었다. 이렇게 움직이는 아내의 모습은 꽃이었고, 이 이벤트의 주인공이었다.

 

드디어 53선승제 복식경기가 시작됐다. 첫 세트는 우리가 이겼다. 복지관에서 아내와 한 팀을 이뤄 복식경기를 여러 번 해본 결과다. 그러나 둘째 세트는 듀스 게임 끝에 지고 말아 일대일이 됐다. 옆에서 아내의 모습을 보니 억울해하는 눈치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좋게 보였다. 순간 분발해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경기에 임한 결과, 셋째 세트와 넷째 세트를 이겼다. 상대가 팀플레이가 잘 안되고 실수를 연발하는 바람에 우리 노인팀이 이긴 것이다. 자식들이 져 줬는지는 모르지만, 이기고 보니 흐뭇한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자식들 모두가 아내에게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며 손뼉을 치고 환호하니 아내는 여왕이나 된 듯 들떠버렸다.

 

경기를 마치자 자녀들이 승자로서 한마디 해달라고 하기에 나는 기회를 아내에게 돌렸고,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모두가 건강해서 운동을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 기쁘다. 올 추석은 정말 좋은 명절이 될 것 같다. 모두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자”.

 

집에 와서 나는 아내에게 물어봤다.

지난번 탁구를 하다가 부부싸움으로 며칠간 지옥같이 보낸 거 말이야, 그거 얘들한테 혹시 얘기했어?”

그럼요, 며느리한테도 말했는데

뭐라고 했어?”

당신이 나를 무시했다고 그랬지.”

!” “그래, 알았어, 다음부터는 그런 일 없도록 하지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던 자녀들이 송편과 다과를 먹다 말고 갑자기 하고 큰 소리로 웃으며 손뼉을 쳐댔다. 이어서 고등학교 2학년 손자가 말했다. “할머니! 내년 추석에도 탁구시합 꼭 해요. 오늘은 제가 실수를 너무 많이 했어요란 말에 그래 알았다. 내년뿐 만 아니라, 다가오는 추석 때마다 그렇게 하자구나라고 아내가 약속해 주었다.

 

그날 저녁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모두 같이 잠을 잤다. 아마도 자식들은 불편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처럼 온 가족이 한곳에 모여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고, 잠도 청하는 모습을 보니 어릴 적 시골 초가에서 대가족이 함께 살던 정취를 느껴볼 수 있었다. 추석 전날 무릎을 맞대고 송편을 빚은 후 쟁반에 담아 제일 먼저 할머니께 갖다 드리셨던 어머니의 모습도 생생히 떠올랐다.

 

이런 느낌 속에 과연, 전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전통이라는 것이 굳이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어야 할까. 시대에 맞게 온고지신하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올해는 탁구 경기로 추석을 맞고 보내는 정취를 온고지신할 수 있어서 더욱더 기쁘고 의미 있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