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 어느 날 / 최병우
십이월 찬바람에
하얀 솜 바지저고리를 입고
마음속으로 흩날리며 찾아온 반가운 손님
칠십여 해를 거슬러 올라가
하나둘씩 따뜻한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짧은 겨울 햇살에도
금 새 눈물 흘리던 고드름
그 속에서 비치던 고운 무지개
얼음판에서 해 가는 줄도 모르고
팽이치고, 썰매 타며 놀던 시절
겨울도 지치면 어느새 개나리가 피고
뒷동산 마른 잔디 위에서 할미꽃이
우리를 부르면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하루해가 언제 사라진 줄도 올랐던 시절
섣달 어느 날 불현듯
마음에서 들려오는 그 시절 이야기에
흠뻑 취해 말없이 추억 속을 걷는데
향기로운 그리움이 앞산 마루에서
새 희망이 되어 고운 햇살을 비춘다
<단상 , 그리움은 희망을>
나이가 들수록 시간의 흐름이 빨라지나 보다. 벌써 2019년 12월 하순, 며칠 있으면 일흔여섯 살이 된다니 어찌 가는 세월을 막을 수 있겠는가. 젊었을 때 그 많던 검은 머리숱은 어디에 갔는가. 휑해진 정수리를 바라보니 노인이 분명하다.
흑발 되면 그 시절로 갈 수 있을 것 같은 안타까움에 염색하고 거울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삭막한 사막 위에 메마른 풀밭, 그래도 아침 이슬을 머금은 듯 잔잔히 나풀나풀 반짝거린다.
오늘도 고요한 적막 속에 고층 아파트 창문으로 밖을 내려다보며 회상에 잠겨본다. 중천에 떠 오른 겨울 태양이 어느새 내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며 칠십여 해를 화살 같이 되돌려 그 옛 시절 고향, 솜 바지저고리 입고 응석 부리던 시절, 눈바람 휘날리던 늦겨울 어느 날에 멈추게 한다.
따스한 양지쪽 초가집 추녀에 매달린 긴 고드름을 따서 칼싸움하고, 칼바람 얼음판에서 고사리 장갑 낀 손으로 썰매 타고 팽이 치던 그 옛날의 어린 친구들이 거기에 있다.
겨울이 지쳐 가버리면, 활짝 핀 수수깡 울타리 속에서 노란 개나리가 뒷동산 마른 잔디 위의 할미꽃과 손을 잡고 높다란 하늘에서 태양을 가져와 말타기 놀이하는 아이들의 등줄기를 덥혀주곤 했다.
세월이 흘러도 마음만은 어린애. 오늘도 그 시절로 돌아가고픈 내 마음, 동쪽 산 넘어 고향의 향기로운 그리움이 조용히 다가와 사그라지려던 희망을 열정과 짝 이뤄 힘차게 바퀴를 돌리라고 부채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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